1. 들어가며

  유영철같은 연쇄살인범이나 김수철같은 아동성범죄자가 매스컴에 등장하면서 요새는 초등학생들도 스마트폰을 들고다니고 부모님이 시시때때로 위치확인을 통해서 아이가 안전하게 귀가했는지를 확인하는 서비스가 유행이라고 한다. 서울시의 초등학교에는 보안관이라고 해서 아저씨들이 학교를 지키기도 한다.

  한편 이러한 불안감은 아이들에게도 비슷하게 존재할 것이다. 인터넷을 조금만 뒤져보면 인육괴담이 판을 치고, 봉고차 납치 등등 다양한 괴담들이 흘러넘치고 있다. 20대인 내 또래도 그런 괴담을 진지하게 믿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그러나 이러한 괴담은 최근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내가 국민학생일 때에도 괴담은 존재했다. 다만 지금은 어른들이 주도적으로 기사화하고있다면, 그때는 아이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선생님이나 부모님들에게 알려지는 형식이었다. 격동의 8말9초에 태어난 아이들은 기억할 것이다 초코파이 박스 뒷면에 붙어있던 개구리소년에 대한 여러가지 이야기들과 홍콩할매를.

 

 

홍콩할매가 어떻게생겼나고 묻는다면 왼쪽의 할머니와 비슷하지 않았을까?

90년대 MBC의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나왔던 '귀곡산장'의 이홍렬

 

  서론이 길어졌다. 얼른 넘어가자.

  홍콩할매는 유치원때 잠깐 들었던 이야기지만 그렇게 임팩트는 없었다. 살던 동네가 지방도시의 변두리라 할머니들을 흔하게 볼 수 있었기에 할머니가 가까우면서 먼 존재인 도시애들과는 할머니관(觀)이 다를 수밖에. 또는 홍콩할매 이야기를 이해하기에 그 당시 내 나이가 무지 어렸다. 하지만 오늘 얘기하려는 빨간마스크는 달랐다.

 

2. 빨간마스크는 누구?

 

 

이런 것이 아니다.

 

  지방마다 전승도 달라서 조금씩 차이는 있으나 우리나라에는 90년대 초반쯤, 대략 93~94년경에 상륙한 것으로 추정되는 도시괴담으로, 빨간마스크를 쓴 키 큰 여자에 관한 이야기이다. 내가 어렸을 때 들었던 이야기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어느날 한 아파트단지 지하주차장에 빨간 옷에 빨간 구두, 빨간 마스크를 쓴 정체불명의 여자가 살고있었다. 그녀는 일견 보기에는 긴 생머리를 가진 슬렌더 체형을 가진 젊은 아가씨였다. 그는 낮에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깜깜한 밤에만 움직인다.

  사람들은 그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빨간 패션에 궁금함을 가졌지만, 곧 그 궁금함은 공포와 절규로 바뀌었다. 그를 만난 사람들은 그로부터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았다.

 

  "내 얼굴 예뻐?"

 

  그는 이 질문과 함께 빨간 마스크를 벗어제꼈다. 빨간 마스크 뒷편에는 턱 가까이까지 찢어진 입술이 있었다. 대부분은 그걸 보고 놀라 죽거나, 혹시 정신을 차려서 질문에 대답하더라도 어떻게든 죽게 되어있다. 만약 예쁘다고 대답할 경우 '똑같이 만들어 줄게' 하면서 죽이며, 예쁘지 않을 경우 화를 내면서 죽인다고 한다. 만약 질문을 회피하여 도망간다고 하더라도 빨간마스크는 달리기가 매우 빠르기 때문에 곧 붙잡혀서 참혹하게 죽이고야 만다.

  빨간마스크는 사람을 죽일 때 특징이 있는데, 품에서 나이프를 꺼내서 사용하기도 하며, 혹은 손을 이용하기도 한다. 하지만 어찌 되었든 자기와 같은 형태로 만들어 죽인다는 점은 같다.

 

  내가 살던 동네에는 1995년경에 위와 같은 빨간마스크 이야기가 나타났다. 나는 당시 국민학교 1학년이었다. 선생님이 없는 쉬는시간에는 빨간마스크가 나타났다더라 하는 이야기를 쉽게 들을 수 있었고, 누구는 저녁에 심부름하고 오는길에 빨간마스크를 멀리서 봤다고 하기도 했다. 누구는 자세하게 작년쯤 일본에서 부산을 타고 건너왔다고 했고, 최근에 광주에 나타난 것이라고 지금생각해보면 놀라운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나중에는 선생님들의 귀에도 이 이야기가 들어갔고, 선생님들은 그냥 귀신이야기일 뿐이라고 했다. 처음에는 애들 장난이겠거니 했던 선생님이었겠지만,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했던가? 당돌한 국딩이었던 내 친구들은 빨간마스크를 잡으러가겠다고 객기를 부리기도 했다. 그 당시 우리들이 생각할 수 있는 무기는 다음과 같았다.

 

1. 모른다고 말하고 튀기 : 그러나 빨간마스크는 달리기가 빠르고 끝까지 추적하여 반드시 답을 얻어내기 때문에 불가능

2. 보통이요 : 가장 단순한 회피방법이지만 빨간마스크를 다시 만난다면 피할 수 없다.

3. 거울 보여주기 : 빨간마스크가 질문을 걸 때 재빨리 거울을 꺼내서 빨간마스크를 비추면 놀라서 죽는다!

4. 마늘, 십자가 : 드라큘라에서 영향을 받은 이야기였지만 드라큘라와 빨간마스크와 싸우면 후자가 이기기 때문에 곧 묻혔다. 주로 교회다니는 아이들이 쓰려던 방법이었다.

5. 단체로 몰려다니기 : 빨간마스크는 여럿이 몰려다니면 누구에게 물어볼 지 결정을 못하기 때문에 한꺼번에 몰려가면 살아남을 수 있다!

 

  우리들이 짱구를 굴려서 내린 결론은 3번과 5번. 특히 빨간마스크가 잠드는 낮에 그가 사는 집을 급습해서 혼을 내자는 결론을 내리고, 곧 실천에 옮기기로 했다.

 

3. 빨간마스크를 잡겠습니다. 잡겠습니다. 안되잖아??

 

 

당시 빨간마스크가 사는 곳으로 알려졌던 우리동네의 한 아파트단지 지하주차장

당시에는 파란 뚜껑이 있던 곳에 녹색 호로(천막)가 있었다

(2013년 6월 2일 촬영)

 

  빨간마스크의 공포에 사로잡히느니 차라리 빨간마스크를 잡아서 경찰아저씨로부터 상을 받자는 우리들의 원대한 계획은 곧 실천에 옮겨졌다. 다들 멍청한 건 아니여서 대다수의 초등학생들이 하교길에 빨간마스크네 집에 한번씩 들락거렸다. 절반은 위와 같은 마음으로 절반은 호기심에. 나는 귀신따위를 안믿어서 후자의 경우에 속했다.

  빨간마스크를 잡는데에는 남자애들보다 여자애들이 적극적이었다.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말은 틀리지 않았다. 여자애들 서넛이 지하주차장으로 성큼성큼 들어가면 한참 후에 꺄아아아아아아아아악 하면서 도로 올라오고, 그러다가 정신을 잠깐 차리고 계속 반복하는 방식이었다. 슬픈건 당시 내가 다니던 국민학교 1학년은 9개 반에 한반에 45~48명정도였으니 최소 300명정도는 들락거렸다는 얘기가 된다. 가뜩이나 이 아파트단지는 학교 정문에 위치해서 정문을 이용하는 학생들은 이 곳을 무조건 거쳐야 한다. 또 1학년만 있겠는가? 2학년 이상까지 올라가면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간다. 당시 우리학교의 전교생은 2000명이 넘었다!!! 특히 2학년 형누나들은 2부제 수업을 했을 정도로 사람이 많았다!!!!

  처음에는 애들 장난인줄 알았던 이 아파트 주민들은 결국 뿔이 났다. 애들이 몰려와서 비명을 질러대고 쓰레기를 버려대고 하다보니 곧 경비아저씨들이 나타나서 빗자루를 들며 쫓아내기 시작했고, 사진과 비슷하게 '외부인 출입금지!!'라는 현수막을 걸어두기도 했다. 그리고 아예 경비아저씨가 의자를 들고와서 주차장 입구에 앉아있기도 했다.

  결국 어른들의 개입으로 빨간마스크 처단(?)은 실패로 끝났다. 다만 이때 지하주차장에 출입하던 아이들의 소문과 소문은 또다른 괴담을 만들어냈으니...

 

1. 빨간마스크 인육섭취설 : 지하주차장 구석에 도마와 도끼(혹은 식칼)이 있는데 이는 빨간마스크가 죽인 시체를 처리하기 위함이다.

2. 빨간마스크 자살설 : 위의 도마와 도끼는 자신의 자해도구다.

3. 빨간마스크 이주설 : 빨간마스크가 우리동네에 온 것처럼 다른 동네로 이동했다. 여기에는 아파트 경비아저씨들이 힘을 썼을 것이다.

4. 빨간마스크 김민제설 : 비슷한 시기 유행하던 돈 괴담의 주인공 김민제(타지역에서는 김민지라고 하는 그 주인공)가 바로 빨간마스크다.

5. 빨간마스크 복수설 : 낮에는 숨어있지만 결국 지하주차장에 들락거린 애들의 집에 복수하러 찾아올 것이다.

 

  이러한 파생소문들이 만들어져서 퍼졌고, 한동안 우리는 빨간마스크네 집에 들락거리지도 못한 채 공포에 떨면서 하교길에 나서야 했다. 그러나 애들은 금방 잊는다고 하듯이 어느순간 빨간마스크 이야기는 사라졌다. 그건 우리동네에 애들이 줄어들기 시작한 96년경부터로 기억된다. 그 이후로는 괴기만화같은데서 빨간마스크가 나오면 옛날에 걔가 왔었지 하고 넘어가는 수준으로 남았다. 빨간마스크가 우리동네를 떠난 애들과 함께 떠나버린 사이 국민학교는 초등학교가 되었고, 나도 1학년에서 2학년이 되었다.

 

4. 빨간마스크의 진실

  이 글을 쓰기 위해서 이리저리 자료를 모으던 중, 나는 신기한 사실을 발견했다. 상술했듯이 빨간마스크는 일본에서 왔다고 했는데, 이 이야기 역시 일본에서 시작된 괴담이라는 것. 홍콩할매는 의외로 국산이었지만.(당시에는 홍콩영화처럼 홍콩산이다. 일본산이다 하는 설이 나뉘어 있었다.) 1970년대 후반 꽃가루와 미세먼지가 심했던 일본의 기후현에서 시작된 괴담이라고 한다. 짙은 화장을 한 채 마스크를 쓴 여자 어른들에게 반갑게 인사하면, 여자 어른들은 마스크를 벗어 반갑게 화답하는 것에서 시작된 것으로, 당시 립스틱을 진하게 바르는 화장에 아이들은 일반적으로 '입이 크다.'를 연상한 데에서 시작된 것이라고.

  7말8초의 일본의 곳곳에서는 공동하교나 가정통신문이 돌았다고 하며, 우리나라에서는 90년대에는 여고생들을 중심으로 돌았다고 한다. 단, 이는 내가 겪은 현실과는 조금 다른데, 이는 우리 동네에 고등학교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빨간마스크 이야기는 2000년대에 다시 재등장했다고 하는데 파란마스크 하얀마스크 등으로 변형되기도 했다고 한다. 단, 이때는 괴담의 중심에 초등학생들이 있었다고. (이상은 한국어 위키백과와 리그베다 위키를 참조함.)

 

5. 마치며

  살펴보면 빨간마스크 괴담 역시 지금의 인신매매 괴담 등과 같이 불안감에 기댄 도시전설의 하나일 뿐이다. 다만 전자와는 달리 아이들의 입을 통해서 괴담이 전파되었고, 이에 대해서 공식적 보도같은건 없던 편이었다. 요새 스타렉스 괴담이나 인육 괴담을 인터넷 찌라시들이 날라대는것과는 대조적이긴 하다. 그런 점에서 빨간마스크 괴담은 상당히 순진한 면이 큰 짖궂은 이야기일 뿐이었다. 마치 옛날이야기의 호랑이나 구미호, 도꺠비같은 존재처럼. 물론 거기에 낚여서 빨간마스크 잡으러가겠다고 한 우리들이 유난스러웠던 건 사실이다.

  그러나 비틀어서 보자면 이 괴담은 개구리소년 사건이나 화성연쇄살인사건, 성수대교 붕괴 등 각종 사건들이 즐비했으면서도, 아이러니하게 단군이래 최대 호황기였던 90년대 후반 한국사회에 대한 불확실하고 불안정한 심리가 발현된 것은 아닐까 한다. 빨간마스크를 무서워하면서도 꼭 한번은 만나서 붙잡고 싶었던 우리들의 심리가 바로 그것이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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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벌써 예비군 2년차다. 휴학을 하다보니 학생예비군에서도 빠졌고, 따라서 예비군훈련도 2박3일짜리를 다녀와야 했다. 지난 6월 초, 예비군훈련을 받기 위해 짐을 싸서 광주로 내려갔다. 하루 집에서 머물고 훈련장소인 진주를 가기 위해서였다.

  진주. 역사책에서는 여러번 본 유서깊은 도시로 경상남도 서부권의 중심지. 조선시대에는 평양과 더불어 잘나가는 도시 중에 하나였다는데... 북쪽 왕가의 수도가 된 평양과는 달리 진주는 인구 30만의 조용한 도시. 사실 2009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냥 우리나라의 작은 중소도시였던 진주는 어쩌다보니 제3의 고향과 같은 곳이 되었다. 이는 군생활을 진주에서 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군필 남성들이 자기 복무지를 향해서는 오줌도 안눈다고 한다. 나 역시 진주를 그렇게까지 호의적으로 볼 수는 없지만, 그래도 남들보다 편하게 군생활을 했기 때문에 오줌을 누기 싫을정도는 아니다.

 

 

2.

  사실 진주는 광주에서 자동차로 과속주행을 하면 한시간 30분 안으로 끊을 수 있을정도로 가까운 곳이다. 그러나 자주 왕래할 수 있는 곳은 아니다. 대전가는 버스가 약 30분에 한대씩, 서울가는 버스는 5분에 한대씩 돌아다니지만, 진주가는 버스는 이상하리만치 적다. 대략 1시간 반에서 두시간정도에 한대씩이다. 그래서 휴가갔다가 복귀하는(특히 일요일) 오후시간대(나는 주로 14시 40분차를 이용했다.)에는 깜빡하면 차를 놓치기 쉬웠다. 평일복귀를 제외하고는 늘 그모양이었기때문에 휴가 나오자마자 복귀하는 버스를 예매하는 것은 필수적인 절차였다.

  만약 진주가는 차를 놓쳤다면 절망적인 상황이 펼쳐진다. 나도 25개월 중에 딱 한번 경험한 적이 있었다. 혹시 진주에서 근무하는 후배들이 있다면 참고하기 바란다. 첫째는 광양(중마동 아니다.)가는 시외버스를 잡아탄 다음 광양읍에서 열차로 갈아탄다. 최근에 광양역이 위치를 옮겨서 힘든 방법이 되었지만, 예전에는 터미널 바로 옆이 광양역이었다. 광양에 주로 16시즈음 도착하면, 광양에서 진주가는 열차가 16시 30분에 있었다. 그럼 여유롭게 진주까지 갈 수 있다. 기차가 느린게 흠이지만 복귀까지는 아무문제 없다. 광양에서 진주가는 시외버스도 비슷한 시간대에 있기때문에 꽤 괜찮은 선택지다. 둘째는 순천가는 시외버스를 잡아탄 다음 순천에서 진주가는 버스를 탄다. 만약 진주가는 버스가 없다면 별수없다. 택시밖에 답이 없다.

 

 

유스퀘어(광천터미널) 8번 탑승구. 대전이나 유성, 진주행 버스가 멈춘다.

묘하게 세 도시는 공군과 관련이 깊다.

 

  야구팬들은 8이라는 숫자를 별로 안좋아한다. 9구단체제 이전에는 꼴찌를 상징하는 숫자였기 때문이다. 나는 다른의미에서 8이라는 숫자가 영 내키지 않는다. 바로 위에 나온 8번 탑승구 때문이다. 복귀날이면 이른 점심을 먹고 아버지나 어머니께서 터미널까지 태워주셨다. 터미널에 도착해서 여기에 오면 나처럼 복귀하는 장병들, 역시 휴가후 복귀하는 항과고생들 몇몇이 어슬렁거리고 있다. 한결같이 표정이 어두웠다. 가끔 심심하다며 말을 걸어대는 사람들도 있었다. 나보다 표정이 더 암울했던 사람들은 한결같이 사천기지 사람들이었다. 사천기지 사람들은 중간에 내려서 사천공항으로 가는 버스로 환승을 하는데, 그시간이 그렇게 아깝다고 한다. 적어도 내가시내에서 맛난거 먹을 시간에 이들은 또 어디론가 이동해야할테니 조금은 불쌍하기도 하다.

 

 

3.

  광주에서 진주가는 고속버스는 중간에 휴게소에 멈춘다. 길이 안막혀서 시간이 남으면, 이 곳에 머무는 시간이 연장된다. 2시간을 딱 맞추기 위해서인지. 아무튼 섬진강휴게소에 내리면 화장실에 들렀다가 여지없이 편의점으로 향하곤 했다. 특히 내가 좋아했던 것은 공장표 카스테라와 사이다. 부대에서는 카스테라같은건 먹기 힘드니까. 공장표 카스테라는 꽤 양이 되는데, 목이 메든 말든 상관없이 허겁지겁 먹어줘야 맛이 난다. 마지막에 사이다를 벌컥벌컥 들이마시고 캬~!

 

섬진강휴게소. 정말로 섬진강 바로 옆에있다. 강 건너편은 경남 하동.

 

  고속버스를 타면서 이동하다보면 암울해지는 경우가 몇몇 있다. 제일 먼저 좌절할때는 석곡(곡성군 석곡면)과 주암(순천시 주암면) 사이. 군생활동안 라디오를 즐겨 들었는데, 일반적으로 이 부근에서 101.1과 96.7이 갈라진다. 101.1의 전파가 점차 약해지면 '아 시밮 점점 진주랑 가까워지네' 하는 생각과 함께 기분이 다운된다. 두번째로 좌절할때는 서순천나들목을 통과할 때. 고속도로에 거리 이정표에는 대략의 지명이 나오는데, '진주'가 처음 나타나는 곳이 바로 서순천이다. 세번째로 좌절할때는 섬진강을 건널때. 경상도와 전라도의 경계가 나눠지는 곳이다. 네번째로 좌절할때는 진교나들목(하동군 진교면)을 통과할 때. 여기서부터 도로번호가 4자리로 바뀐다. 제주도를 제외한 한반도에서 도로번호가 4자리로 뜨는 곳은 경상남도 뿐이다. 마지막으로 절망할 때는 진주시로 나가기 위해서 사천 지나서 우측차로로 꺾을때다. 그리고 개양정류장을 지나 진주시내로 들어가면 이내 세상에서 지을 수 있는 가장 더러운 표정이 얼굴에 나타나게 된다.

  한편 휴가나갈때는 반대로 된다. 첫째로 행복할때는 진주시를 벗어났을때. 머리위로 통영가는 고속도로가 지나가면 안심이 된다. 둘째는 섬진강을 건널때. 특히 겨울에 경남에는 눈이 잘 안오는데 이상하게도 섬진강만 건너면 폭설이 몰아친다. 아 눈의 고장 전남이구나! 하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이 나온다. 세번째는 진월(광양시 진월면). 고속도로 옆으로 지방도 하나가 지나는데 지방도 번호가 800번대다. 숫자주제에 나에게 녹색의 땅 전남에 오신것을 환영하는듯한 느낌이다. 네번째로 행복할 때는 옥과(곡성군 옥과면)를 지날때다. 이정표에 15번 국도가 나타난다. 지금까지 마주친 도로들 중에서 고속도로를 제외하고 광주로 직결하는 유일한 국도다. 일단 국도 숫자에 1이 들어가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다.(우리집이 13번국도 바로 옆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마지막은 동광주 톨게이트 지날때. 전쟁나지않는이상 누가 날 이 밖으로 끌고나갈 수 없을거다라는 느낌이 팍 든다.

 

 

4.

  진주에 도착하면 저녁때 무엇을 먹고 들어갈지는 정말 중요한 고민이다. 기왕이면 사회의 단물을 빨아먹을 수 있을만큼 빨아먹기 위해서다. 진주에도 '시내'가 있지만, 사실 진주 먹자골목의 핵심은 이른바 '산대'다. 경상대도 있지만 금산가는 버스가 없어서 제외한다.

 

 

진주고속터미널, 진주 환락의 중심(??) 산대(정확히는 칠암동)에 있다.

 

  환락의 중심이라고 거창하게 말했지만, 사실은 그냥 대학가고, 대학생이 아니었던 나에게는 소용이 없다. 가끔 복귀일이 같은 선/후임을 만나면 이 근처에서 밥을 같이 먹고 같이 복귀하는 선례가 있었다. 아 그전에 앞 공중전화에서 부대에 전화하는 것이 우선이었고.

  주로 먹었던 메뉴는 터미널 바로옆의 중국집(이번에 갔을 때 보니 없어졌다.)과 교육사 장병들에게 역사와 전통급으로 유명한 옥천식당 제육이 있었다. 이번에는 같이 예비군훈련을 받게 된 672기 동기 성찬이와 함께했다. 성찬이와는 같이 행정학교에서 근무했다.

 

 

옥천식당 전경. 산대정문 건너편 골목으로 한 30미터정도 들어가면 있다.

충북 옥천군이나 냉면으로 유명한 양평 옥천과는 무관하다.

 

이게 바로 옥천제육. 제육보다는 저 찌개랑 계란말이가 더 맛있었던 것 같다.

 

  옥천제육은 휴가나가는 날 아침을 때울 때, 복귀날 저녁을 때울 때 선임들이 사주던 메뉴였다. 식당이 최신식이 아니라서 거부감이 드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일단 양하나는 끝내준다. 그때는 선임 앞에서 '와구와구'(결코 수사가 아니다.) 먹어야 예의였기 때문에 보이는 음식을 게눈 감추듯 흡입하곤 했다. 지금은 그럴 필요도 없지만, 무지 배가 고팠는지 난 이날 두그릇이나 먹었다.

  대부분 같이 들어가는 경우 여기서 택시를 타고 복귀하곤 했다. 아니면 간부들 차를 얻어탄다거나. 그러나 나는 주로 평일복귀자였고, 사무실 특성상 남들과 휴가가 잘 겹치지 않았다. 심지어는 친구들과도 겹치지 못했던 적이 많았고. 어쨌든, 그런 경우 위의 옥천제육을 잘 먹지 않았다. 혼자먹기에는 비싸니까. 그래서 차선책으로 이용했던 곳은 시내의 여러 음식점들. 시내가는 버스들(주로 XX광장이라고 이정표에 써져있으면 아무거나 상관없다.)을 타고 시내에서 짱깨나 일식, 스파게티, 아님 분식 등을 먹기도 했고. 어떤날에는 서부시장까지 가서 진주의 명물 진주냉면을 먹기도 했다. 일단 시내행의 장점은 금산가는 버스가 있다는 점이었다. 산대앞에는 아쉽게도 금산가는 버스가 없다. 나중에 333번이 생겼지만 이것도 공교사행은 하루 n대 수준이었다. 시내에서는 좀 버스노선이 꼬여있어서 병장달고나서는 시내보다는 하대동을 선호했다. 하대동에도 진주냉면집이 있었고, 학생들을 상대로 한 저가 음식점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5.

  저녁을 다 먹고 복귀할 때가 되면 생각보다 기분이 더럽지 않다. 이미 더러워질만큼 더러워져서인지. 아니면 적응이 되어서인지. 그냥 '내 집 돌아가야지 에휴' 하는 생각이 주로 들었다. 물론 저 에휴가 더 큰 것이 핵심이다.

  금산가는 버스는 내 전역일까지 기준으로 188번, 70-2번이 있었다. 지금은 268? 281?인가 번호가 바뀌어서 잘 모르겠지만, 그때는 한 번호에도 이정표따라서 노선이 다 달랐기 때문에 주의해야했다. 공교사에 있던 한 멍청이는 188번이라고 아무거나 탔다가 금산면 어디 논 한복판에 내려져서 걸어온 경우도 있었다.

 

 

25개월간 살았던 공교사의 1정문.

이 앞에 혁신도시라고 신도시가 들어서서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다.

 

  188번의 경우 2정문까지 운행한다. 차는 안으로 들어가 관사단지까지 운행하지만 장병은 정문에서 내려서 걸어들어가야 한다. 2정문을 통과하고나서 X밴드를 차고 비성대로를 걸어갈때는 정말 여러가지 생각이 들곤 했다. 저멀리서 다가오는 자동차들을 향해 자동적으로 경례하는 내 모습을 보면서, '아 짤없는 군인이구나' 하는 생각이 주로 들었다. 당직실에 보고하고나서는 재빨리 씼고 점호끝나자마자 골아떨어지곤 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휴가 복귀날만큼은 웬만해서 선후임들이 잘 안건드렸다.

  70-2번을 탄 경우에는 2정문에 내려서 걸어가는 경우도 있었지만, 어떤때는 1정문(1정문 옆 속사리가 종점이다.)에서 내려서 걸어가기도 했다. 1정문 근처에 부대가 있어서 당직실에 당직서는 병사한테 인사하러 가는 경우가 많았다. 또 이쪽은 차가 잘 안다녀서 혼자 여러가지 생각을 많이 하곤 했다. 제일먼저 든 생각은 물론 밀린 업무들이었지만.

 

 

6.

  이번에 훈련차 진주에 다시 가서 놀란 점은 교육사가 많이 바뀐 점. 주변지역이 바뀐만큼 공교사도 조금씩 변해온 모양이다. 특히 이번에 행정학교에 들렀을 때는 내가 있을때보다도 더 분위기가 더 좋아졌다. 말년이 된 태용이(전역 전에는 하하사님이었지만)를 보니 국방부 시계는 거꾸로 가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부대에 있을때 가보지 못한 진주시 곳곳의 명소나 2정문지역(금산면 시가지)도 가보려 했지만 어찌어찌하다보니 가지 못했다. 하지만 25개월의 경험들을 3일간에 압축적으로 느낄 수 있던 귀중한 시간이었다. 당분간은 올 일이 없어서인지 더 소중하게 느껴진 시간이었다.

Posted by 인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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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까칠이 2013.07.29 23:5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너무도 실감나게 같이 동행 했습니다.

  2. 622 2013.11.30 09:3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공군 출신으로서 반갑네요. 실감나게 잘 읽고 갑니다.

  3. rokaf 2014.03.19 03:3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랫만에 진주사진 잘 보고 갑니다.
    같은 공교사 출신이시네요..비슷한 시기에 있던것 같습니다.

  오늘 주말을 맞이하여 은평구와 서대문구 경계에 있는 백련산에 다녀왔다. 백련산이 있는 응암동은 옛날에 넷째외삼촌네가 살던 곳이었다. 지금은 외국으로 이민을 가서 연락도 안되지만, 우리가족이 서울에 갈 일이 있으면 그곳에서 머물곤 했다. 서울 올 일이 많지 않다보니 많아야 두세번정도 간 것 같다. 가장 최근에 방문했던 적은 중1때인 2001년, 기억에 남는 가장 옛날은 93? 94?년이다. 초딩때(95-00 사이)도 몇번 갔던 기억이 있다.

 

  아버지에게 자가용이 있긴 했지만, 서울갈때는 주로 기차를 이용했다. 지금은 KTX가 있어서 편하게 가지만, 그당시에는 새마을호가 KTX급의 열차였다. 그래서 주로 무궁화호를 이용했다. 지금 무궁화호랑 크게 차이는 없지만, 그때는 그 아래급인 통일호나 비둘기호도 있었다. 어렸을때는 열차가 서지않는 간이역들까지도 외우곤 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왜 그걸 외우고 앉아있었는지는 모르겠다. 덕분에 지금도 사라진 역들까지도 몇개 외우고 있다.

 

 

지금은 박물관 비슷한 것으로 쓰이는 옛 서울역

옛날엔 되게 커보였다.

 

  지금은 호남선 열차가 모두 용산역에서 끊기지만, 당시에는 용산역은 존재감이 없었고, 서울역에서 모든 열차가 종착했다. 건물을 나오면 광주에서 가장 넓었던 80m 광로의 몇배나 되어보이는 서울역 광장이 보였고, 그 앞에는 육중한 대우빌딩(현 서울스퀘어)이 불빛을 내뿜고 있었다. 도착해서 공중전화나 핸드폰(90년대 후반 이후)으로 외삼촌에게 연락하면 외삼촌이 데리러오거나, 꼭 타라고 하는 버스가 있었다. 그 버스는 바로 빨간색 150번이었다.

  서울역에서 어떻게 이걸 타면 서소문-독립문-홍제역-녹번역을 거쳐서 응암동으로 들어왔다. 어렸을때니 지명은 하나도 몰랐고, 어떤 골목길로 한참 올라가다가 중간에 내리면 외삼촌이 데리러 나왔다. 그러면 버스정류장 초입부터 산길을 따라서 걸어올라갔다. 한참을 걸어올라가면 산중턱에 연립주택같은게 있었고 거기가 외삼촌의 집이었다.

  2001년에 서울에 왔을때는 외삼촌께서 차로 마중나와주셨는데, 그때는 왜인지 충무로역에서 만나서 이동했다. 길막힌다고 신촌으로 돌아서갔는데, 연대앞을 지날때 외삼촌께서 니도 나중에 공부 열심히해서 이런 학교 들어가야한다고 했던 기억이 있다. 실제로 거길 들어오고 나중에 생각해보니 조금 신기하다.

 

 

외삼촌이 마중나오시던 골목 앞.

길은 배로 넓어졌고, 빨간 150은 녹색 7019번으로 바뀌었다.

알고보니 지금 살고있는 방 앞을 지나는 506번과 5528도 빨간 150의 일부.

 

  외삼촌네 집에 들어가면 간단히 저녁을 먹거나, 사촌들과 노는데 시간을 보냈다. 주로 서울에 올 때는 가족행사같은것으로 오는 경우가 많아서 밤이되면 어른들은 밖으로 사라지고, 늦은 밤, 집에는 어린이들밖에 없었다. 90년대 초반에는 PC가 귀해서 컴퓨터게임은 접하기 힘들었고, 외삼촌네에는 그땐 컴퓨터가 없었다. 그러면 사촌이 만화 비디오를 꺼내왔다. 그리고 비디오를 보다가 잠이 들곤 했다. 그때 보던 만화는 '근육맨'이라는 만화였는데, 그때는 그 만화가 일본만화인지도 몰랐다. 만화는 테레비에서만 하는것인줄 알았는데 서울은 뭔가 다르긴 다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비디오판 오프닝이 남아있었다.

알고보니 근육맨은 일본의 국민만화급의 인기를 누린 물건이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밥먹고 밖에서 놀곤 했다. 연립주택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산 중턱에는 소방도로가 널찍하게 있었고, 거기서 공을 차며 놀았다. 가끔 공이 굴러떨어지면 계단 밑으로 뛰어가서 주워오기도 했다. 낮에 밖에 나오면 밤에는 보지 못했던 것들이 보였다. 꽤 높이 걸어왔는줄 알았는데 외삼촌네 집 뒷편으로도 더 많은 집들이 있었고, 집들 사이사이로 계단들이 어지럽게 이어져있었다. 그때의 궁금증은 서울사람들은 왜 산에 사는가였다. 내가 살던 광주 변두리에는 산이 없었기 때문에 멀쩡한 평지를 두고 산에 모여사는 서울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계단같은데 앉아서 건너편을 바라보면 반대쪽 산에도 사람들이 바글바글 모여살았고, 아래로는 서울 시가지가 한눈에 보였다.

  

 

뒷산인 백련산에서 찍은 서울 시가지. 아래쪽 나무 바로 위 아파트단지가 옛 연립주택단지.

예전의 서울사람들은 산에 연립주택을 짓더니 지금은 아파트를 지었다. 나중엔 무엇을 지을까.

 

 

그때 타던 마을버스는 지금의 은평05로 남아있었다.

그러나 옛날 외삼촌이 살던 동네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그 자리에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다.

 

  점심을 전후로 (먹거나 그보다 전에) 광주로 돌아갈 때가 되면 외삼촌께서 맛있는거 사먹으라고 지폐를 쥐어주곤 했다. 그리고 마을버스를 타라면서 마을버스가 다니는 골목 근처까지 배웅해주셨다. 마을버스가 뭔지 몰랐던 나는 산 위에서 내려오는 봉고차보다 큰 차가 버스라고 돌아다니는게 신기했다. 그리고 어린이 버스비가 100원밖에 안하는게 매우 신기했다.(광주 어린이 시내버스비가 200원 전후였던 시절이다.) 그리고 왔던 대로 빨간 150을 타고 서울역으로 돌아가거나 마을버스를 더 타서 녹번역까지 내려와서 전철을 타고 돌아갔다.

 

 

녹번역 4번출구.

지금보면 그냥 작은 역인데 어렸을땐 그 주변이 되게 커보였다.

 

   나중에 광주에 돌아와서는 서울에서 겪었던 일들이 환상같다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별다를거 없는 사람사는 모습이었는데, 왜 그때는 그렇게 받아들였는지 모르겠다. 초등학교때 일기장에는 서울 갔다오면 서울에서 있었던 얘기로 일기를 몇쪽 채우기도 했다. 머리가 굵어지면서는 '꼭 공부 열심히해서 서울로 대학가야지'로 귀결되는 결론을 내렸다. 어머니께서는 그런 나와 동생을 보며 이놈들이 서울병에 걸렸다고 얘기하곤 했다. 뭐 그 덕분인지 동네에서 몇 안되는 서울 대학생이 되긴 했다.

  2001년 이후론 넷째외삼촌네가 이민을 가버려서 연락이 안된다. 최근에 강연이형이 애총이 싸이월드 주소를 알려줬는데, 내가 내 아이디의 비밀번호를 까먹어서 못들어가고 있다. 뭐 때되면 어떻게든 연락이 닿겠지 뭐. 그때는 이걸 영어로 설명해줘야 하나? 한국말은 기억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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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이트데이다. 남자가 여자에게 주는건지, 여자가 남자에게 주는건지는 모르겠는데 하여간 연인들끼리 사탕이나 선물꾸러미를 주는 날이다. 한달 전의 발렌타인데이는 가톨릭 성인의 축일에서 시작되었다고는 하지만, 화이트데이는 정말로 상술에서 나온 날일 뿐이다. 몇몇은 3.1415로 시작하는 원주율 π를 생각하자는 뜻으로 파이데이를 만들어 원주율 π를 열심히 외우기도 하고 어떤이는 커플들 이나 다 썩어버리라고 폭풍같은 저주를 퍼붓기도 한다. 하여간 대다수의 솔로들은 열심히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면서 열등감을 폭발하곤 한다.

  나 역시 태어난 이래 단 한번도 커플이 되어본 적 없는 모쏠이다. 그래서 학교다닐때는 이런 날들이 정말 싫었다. 어떤 친구들에게는 책상 한가득 초콜릿이나 사탕같은것이 쌓여있지만 내 책상 위에는 그런것은 없었고, 어쩌다 선생님이 반 아이들 전체에게 돌리거나, 초콜릿이나 사탕이 너무나 많아 집에 들고가지 못했던 몇놈들이 없는 애들에게 나눠줄 때 어쩌다 받는 것이 전부였다. 특히 눈치없는 선생들이 '넌 왜 하나도 안받았어?'라고 물어보는 소리가 너무 싫었다. 특히 사람들 많은 곳에서 말해버리면 누군가 못이기는 척 하고 주는 경우가 많았기에 그게 더 싫었다. 안받는것보다 더 기분나쁘기 때문이다. 머리가 굵어지면서 무슨무슨데이를 무시할만큼 커버린 중학교때와 아예 남자들밖에 없었던 고등학교때를 제외한 초등학교 시절엔 무슨무슨데이는 학교가기 싫은 날이었다.

 

  돌이켜보면 무슨무슨데이는 나의 인기없음을 확실하게 증명하는 날이기도 했다. 그렇다. 지금도 그렇지만, 지금껏 살면서 단 한명의 이성과도 사귀어본 적이 없고, 좋아한다는 소리도 들어본 적이 없다. 지금도 누구에게 호감가는 이미지는 아니지만, 초등학교때의 나는 지금보다도 확실히 인기가 없었다. 또래애들보다 항상 5~10cm정도는 작았고, 활발하지 않은 소극적인 성격, 비염으로 인해 하루종일 코를 훌쩍여야만 했던 나를 좋아할만한 사람은 한명도 없었다. 거기다가 유일한 기믹은 역사덕후. 뭐 그때는 덕후라는 말이 없었으니 그렇게 불리지 않았지만, 26살이 되도록 별명이 거의 없었던 중에 갖고 있던 몇 안되는 별명은 '사전'이었다. 대충 어떤 이미지였을지 다들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유일한 스캔들은 얼굴도 모르는 옆의옆의옆의옆의 윗층 반에 있는 한 여자애와의 스캔들이었다. 왜 그사람과 소문이 돌았는지는 모르겠다. 하여간 덕분에 2년동안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을 혼자 좋아한다는 소문이 돌았고, 심지어는 여자애들마저 그것을 가지고 놀렸다. 처음 몇달동안은 애써 아니라고 부정했지만, 그 후로는 포기했다. 어차피 얘네들은 놀리는 행위 자체를 즐길 뿐이었기 때문이다. 이상한 소문이 돈다고 선생한테 하소연을 했지만, 선생은 오히려 그 소문을 부추겨 학교 전체로 퍼뜨리는데 일조했다. 그래서 난 지금도 초등학교 선생이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을 별로 안좋아한다. 어쨌든 그런 소문에도 전학 안가고 학교 멀쩡히 졸업한 스캔들의 상대방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지금 뭐하고 사는지는 나도 모른다.

 

  그런 인생에 딱 한번 특이점이 존재했다. 6학년 때 있었던 일이다. 같은반 한 여자애가 나한테 이상한 쪽지를 주면서 얘기했다. 전달자가 누구였는지는 기억은 나는데 이름이랑은 다 까먹었다.

  女 : 야 이거 5반에 내 친구가 준거야 받아.

  나 : 이게 뭔데?

  열어보니 누군가 정성스레 종이에 나한테 고백하는 내용의 글이었다. 뭐 지켜봤는데 맘에 든다 좋아한다 이런식의 내용이었기에 당연히 의심했다. 일단 5반에는 날 알만한 사람이 없다.

  나 : 야 옆반에 날 아는사람이 없는데 이걸 누가 써.

  女 : 나도 그냥 전달만 해주는거야 그러니까 나한테 화내지마.

  나 : 야 말이돼? 혹시 이거 동생한테 가야하는거 아냐?

  동생과 쌍둥이였기 때문에 나와 동생을 헷갈린 누군가의 소행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쪽지 안에는 빼도박도못하게 내 이름이 적혀있었다.

  女 : 여기 니 이름 안보이냐?

  나 : ......

  6학년때는 위의 스캔들이 진정될 때였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이것들이 또 장난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스캔들의 상대방은 5반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가능성은 하나다. 얘가 조작한거다.

  나 : 야 이거 너가쓴거지. 어디서 사람을 속여?

  女 : 아닌데. 내가 미쳤냐?

  나 : 야 글씨가 네글씨잖아. 숙제를 몇번이나 베꼈는데 네 글씨를 모르겠냐?

  이때 숙제하기 귀찮아서 공부 쫌 하는 여자애들 과제를 자주 빌렸고, 베끼느라 대충의 글씨는 알고 있는 상태였다. 그러고보니 조금 비슷한것 같긴 했지만, 이 친구는 끝내 부인했다.

  나 : 아 몰라. 이거 장난일거니까 안받을래. 나 이거 버린다.

  女 : 야 너 진짜 못됐다. 걔가 알면 어쩌려고그러냐

  나 : 옆반이라며. 니가 말만 안하면 모를거아냐.

  그리고는 쪽지를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리고 이것은 장난인지 진짜인지를 떠나서 여자한테 받은 처음이자 마지막 고백이었다.

  그 이후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 일이 봄 아니면 가을이었던 것으로 기억나는데 그 이후로 이어진 무슨무슨데이엔 여전히 내 책상은 깨끗했다. 애당초 가짜라고 믿었기에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그리고 무슨무슨데이에 선물을 받는 일은 이후로도 없었다. 26살이 된 지금까지.

 

  지금 초등학교 동창중에 연락하고 지내는 사람이 한명도 없고, 위 사건이 대단히 소소한 일이어서 기억하고 있는 사람도 나밖에 없을 것이다. 즉 범인이 누구인지 확인할 길은 없다. 지금 생각하면 누군지는 몰라도 고맙다고 받아둘 걸 한다. 동생과 나를 착각해서였다면 동생한테 알렸을 일이고, 만약 진짜 수취인이 나라면 적어도 기억에 남는 추억 하나쯤은 될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어차피 꼬마 수준의 첫사랑이겠지만. 만약 가짜라면 못해도 받아주는 척을 하면 적어도 상대방이 덜 부끄러워했을것 같다. 지금이나 그때나 여전히 눈치가 없는건 똑같나보다.

  지금 당사자들이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위의 쪽지가 진짜라면 쪽지의 주인공에게 한마디 해주고싶다. 미안하다고. 위의 쪽지가 가짜라면 쪽지의 주인공에게 한마디 해주고싶다. 그때 왜그랬냐고. 그리고 전달자였던 친구를 언젠가 만날 일이 있다면 위 이야기를 한번 물어보고싶다. 알고 있냐고 어떻게 된거냐고. 아마 모를 가능성이 99%겠지만, 그런 일이 있었다고만큼은 꼭 알려주고 싶다. 아 슬프다.

Posted by 인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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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며칠 전에 동생과 친구와 여행을 다녀왔다. 동해안으로 가는 길에서 우리는 친구가 받아놓은 걸그룹 노래들과 동생이 받아놓은 일본노래들을 들었다. 카오디오가 좋은것이 많아서 요새는 폰과 연결만 해주면 폰으로도 음악을 틀 수 있어 가능한 일이었다. 작년에 동생과 경남지역으로 여행갔을 때도 그런 식으로 음악을 들으며 이동했다.

  그러고보니 어렸을 때도 아버지의 자동차 안에서는 음악을 자주 들었다. 특히 지금처럼 길이 좋지도 않았기에 어린 나이에 자동차를 타는 일은 매우 힘든 일이었다. 할머니댁에 가는 경우에는 아예 차에서 잘 것을 생각하여 밤에 이동한 적도 많았다. 그게 아니면 테이프를 와장창 들고가서 이동하는동안 틀곤 했다.

 

  기억이 남아있는 기간에 한정해서 보면, 아주 어렸을 때는 동요 테이프를 들었다. 어머니께서 어디선가 꼬까방 테이프 3개를 사오셨는데, 두개는 클래식 음악이었고 하나는 동요가 50여개 들어있는 테이프였다. 클래식 테이프는 주로 집에서 들었고, 동요 테이프는 시골갈때 주로 틀어주셨다. 그리고 그게 질리면 굳이 겨울이 아니더라도 아버지 차에 오래전부터 들어있던 캐롤 테이프를 틀었다. 대우에서 만든 워크맨 '요요깜' 사은품으로 준 테이프였던 것으로 보아, 아마 그당시 대우전자 대리점을 하던 희관아저씨가 주신 것으로 추측된다. 캐롤 테이프의 앞면은 모두 가사가 있었고, 뒷면은 가사 없는 긴 노래들이 많아서 뒷면이 나올때면 거의 졸았던 기억이 있다.

  그게 질릴 때 쯤이면 팝송을 주로 들었다. 아버지께서 들었던 것인지 어머니께서 들었던 것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예전에 젊으실 때 듣던 것이라며 팝송이 여러개 녹음된 테이프가 있었다. 팝송 테이프는 2개가 있었는데, 하나는 지금 곽만 집에 남아있다. 딱히 기억이 없는 것으로 봐서 잘 안들었던 것 같다. 다른 하나는 곽마저도 남지 않았는데, 아버지께서 차를 바꾸는 과정에서 없어졌다고 한다. 이것은 마르고 닳도록 들어서 지금도 그 곡들을 기억하고 있다. 그때 들었던 노래들의 제목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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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외에는 한국 옛날가수들 노래들 모음 테이프 하나가 있었다. 뭔가 고속도로테이프스러운 스타일이었는데, 그당시에는 듣도보도못한 가수들 노래가 많았다. 노래제목들은 다 까먹었고, 산울림의 청춘 하나정도만 기억이 난다. 그리고 어떤노래였는지는 기억이 안났는데, 지금은 고인이 된 길은정의 노래도 들어있었다. 그때 테레비에서 심심한날 친구가 필요한날 종이접기같은걸로 친구를 만들어주던 프로그램 진행자였던 그 아줌마가 원래 가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되게 뽕필나는 노래들이 많았던 것 같다.

 

  아마 96년인가 97년경쯤? 어머니께서 테이프를 사오셨다. 시인과 촌장의 <숲>과 이승환의 데뷔앨범인 <B.C 603>이었다. 이 두 테이프는 정말 마르고 닳도록 많이 들었다. 당시 집에서 할머니댁까지는 1시간 30분정도가 걸렸기 때문에 두개 정도는 너끈히 들을 수 있었다. 어쩌다가 늦어지면 그걸 반복해서 들었기 때문에 어머니는 (특히 몹시 피곤할 때인 광주 돌아가는 길에서는) "이승환 목아프겠다. 그만 듣자."라고 말하며 테이프를 꺼버리시기도 했다. 테이프 따위는 감정이 없다는걸 잘 알았지만, 그래도 괜히 겁이 나서 아프지마라고 테이프를 끄곤 했다. 특히 어머니께서는 시인과 촌장의 <가시나무>를 좋아하셨는데, 나중에 조성모가 리메이크를 했을때 혼이 실려있지 않다며 가루가 되도록 까곤 했던 기억이 있다. 엄마 말로는 심오한 뜻을 가진 노래를 단순 사랑노래로 바꿨다고 하는데... (음악을 몇개 가지고 있어 올리고 싶은데, 저작권 문제로 벌금물거나 감방갈까봐 패스) 이즈음 어머니께서 지방방송국 노래자랑에 한번 나가신 적이 있었는데, 그때 노래연습한답시고 김종찬 베스트앨범을 사신 적이 있었다. 이것도 가끔 차 안에서 어머니께서 틀곤 했다. 어머니께서 정작 노래자랑 나가서는 다른 가수의 노래를 부른 것은 함정이다.

  그러다가 어느 시점에 아버지께서 세차를 맡겨놓은 사이 테이프들이 몽땅 사라져버렸다. 특히 위에서 설명한 팝송 테이프들이 없어졌는데, 어머니께서 매우 안타까워 하셨다. 아무래도 그 테이프는 어머니의 작품이었나보다. 그리곤 어디선가 누군가 만들어줬다는 녹음테이프 두개를 가져오셨다. 여기에는 우리나라 7080가수들의 노래들이 들어있었다. 하나는 잘 기억이 안나는데 조금 올드한 가수들이 모여있었고(정태춘이나 해바라기 김정호 등의 노래들이었던 것 같다.) 하나는 조금 후반의 가수들이 모여있었다. 기억나는 하나의 테이프의 노래목록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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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이 즈음에는 테이프보다는 라디오를 주로 들어서 차안에 들고가서 듣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어쩌다 KBC 방송이 질린 어머니께서 들고가는 경우가 있었을 뿐이다. 또 시골가는길이 좋아져 테이프 한개 겨우 다듣는 정도의 시간으로 줄어버린 이유도 있었고. 또한 중학교 입학한 해 생일선물로 화이트 4집과 김동률 3집을 받은 이후 용돈을 쪼개서 테이프를 와장창 모으기 시작하면서 먼길갈때 필요한 테이프들은 나와 동생의 콜렉션에서 뽑아서 듣곤 했다. 나중에 잃어버린 이승환의 앨범 등을 다시 샀을때는 옛날기분 낸다고 들고가서 틀었던 적도 있다. 다행히 나와 동생의 콜렉션이 어머니께서 좋아하는 음악과 거의 겹치기 때문에 별로 태클걸린 적은 없었다. 물론 100개가 넘는 테이프를 두개만 골라도 경우의 수는 매우 많기 때문에 질릴 수도 없다. 그리고 KBC와 결별(?)한 어머니는 지금은 KBS 클래식방송을 들으시며 운전을 하신다.

 

  요새는 아버지께서 일하시느라 차 몰일도 없고, 가족끼리 먼길 갈 일도 없어서 테이프는 잘 안듣는다. 어머니차나 아버지차 빼앗아서 동생과 여행갈때나 가끔 듣는다. 그나마도 요새는 관심음악분야가 바뀌어서 그냥 스마트폰으로 인터넷 연결해서 듣는 경우가 많다. 그러고보니 어머니께서는 클래식 외에도 80말90초의 음악들을 좋아하시고 아버지는 최성수 변진섭 등을 좋아하셨다. 예전에 어머니 생신때 예전에 듣던 팝송 노래들을 복원해서 CD로라도 구워드리려 했는데 실패했던 적이 있었다. 집에서는 가끔 테이프 몇개로 어머니의 DJ 노릇을 할 때도 있지만, 언젠가 먼 길 여행갈 때가 있다면 부모님이 좋아하시는 노래들을 따로 녹음해서 틀어드려보고 싶다.

Posted by 인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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